21/11/2024
입대 날, 부모님이 새벽부터 차를 태워주셨다. 아침은 차 안에서 김밥으로 때웠다.
휴게소에서 신발 앞에 보라색 풍뎅이가 지나가 자세히 보니, 날개에 햇빛이 부딪쳐 무지개 색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훈련소 앞에서 차에서 내리고,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입소를 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 내리자마자 PCR검사를 하고, 통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생활관에 들어가.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조교님께서 잠만 재워 주셨다. 훈련하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격리되어 밥도 잠자리에서 먹었다. 입대 직전까지 일하느라 바빴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푹 잤다.
다들 어색해서 생활관이 조용하다가, 몇 명이 말을 트길래, 나도 심심하던 김에 옆 사람이랑 대화를 시작했다. 여자친구와 결혼 얘기 나누고 온, 운전병 지망하는 친구와,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법대생 형을 만났다. 여기서 나보다 형을 만날 줄 몰랐는데, 놀랐다. 왠지 다들 나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날부터 여러 날 동안 샤워도, 면도도 못하며, 마스크도 못갈았다, 전염병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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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풍뎅이의 날개 속 무지개
001/544 - 입대하다
핸드폰을 반납할 때 미처 못 끄고 내서
알람이 계속 울리다가, 점심때 되어서야
배터리가 다 됐는지 조용해졌다.
오전 내내 격리 때문에 훈련도 없이
먹고 자고 하느라
시간이 다 가버렸다..
그러다 정식으로 생활관이 정해졌다.
(이름 가나다순으로..)
이날 같은 분대 애들이랑 인터넷 방송 얘기를 하며 친해졌다.
성격이 쾌활한 상덕이(눈 마주치는 상대에게 팔꿈치로 코로나 악수를 건네는 쾌남!),
여자친구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영제,
인성 터진 건창이,
형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생활에 대해 아는게 많은 영길이,
영길이 친구로 성우를 지망하다 왔다는 용일이,
모델 하다 온 태수,
배우로서 현장에서 일하다 온 상철이,
인터넷 방송인이 꿈이라는, 성대모사 달인 승태,
안경사가 되고싶은 세정이,
27살 변호사 지망생 형순과 만나 친해졌다.
한국으로 귀화한 중국인도 있었는데, 한국말을 못해서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옆 생활관으로 갔다.
일기를 쓰면서
뉴스에서 본 개그우먼 자살 기사가 생각나 사실인지 걱정되고··· 미국 대선 결과, 코로나 검사 결과가 궁금했다.
002/543 - 훈련소 시작
이 날은 하루종일 검사를 받았다.
입는 옷 치수 조사, 귀가 인원 조사, 건강 검진 등.
검사도 종류가 참 다양했다..
군대에 복무할 사람에 대해,
'평균'에 맞는 사람인지 건강조건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어느 사이즈의 보급품을 지급할지 체크하는 것일테다.
검사가 끝나고 생활관에 돌아오니,
다들 공통으로 무언가를 겪어서일까
한층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졌다.
이제 다들 서로 편하게 대하다 보니
당연히, 남성들의 통과의례로같은.
다소 무례한, 여군 농담 등이 나온다.
'여군은 화장 무너지니까 훈련 빠진다더라'
'회식에 잘 따라다니는 여군은 남군보다 진급이 잘 된다더라..'
또 '여자 비서는 입이 두개라 취직이 잘된다더라...'
악의는 없겠지만 생각해보면 무서운 농담, 밈의 전파력이었다.
어쩌면 여성 직업군에 대한
남초 유행어로서
학습된 적대감, 악의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에도 세 명의 '분위기 메이커'가 있다.
두 명은 배우, 성우로 대중을 상대하는 업을 해오던 애들이고
한 명은 밤마다 기도하고 자는
성실한 교인이어서 인지,
저속한 주제에 있어서 선을 지키는것 같다.
예를 들어 태백에서 온 상덕이가
자기 친구 안마방 다녀온 얘기를 하니,
용일이가 ‘걔네는 정말 불쌍한 거다.'
'쥬.. 쥬만지가 녹는다..!'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거다..’
하며, 야동이 그래서 유해한거라 했다.
분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내가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20, 21살 남자 애들의 인식이
생각보다 건전해서 신기했다.
양성평등교육 활동,
2016년부터의 그 리부트가 만든
새로운 문화와 관습이
이룬 성과이지 않을까..
사실 좀 분위기 양아치같고 무서운 애들이
성구매 얘기하거나 그러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003/542 - 불안감과 농담
오늘은 옷 보급을 받으러
창고앞에서 기다리는데,
옆 소대 인원들의
대화를 듣고
우리 소대 분위기가
아주 잘 조성된 편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쪽은 아주
욕을 입에 달고 있는
양아치같은 인원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주도하게 된 듯했다.
섹스vs담배로 시작한 음담패설이
여자 연예인의
유두-성기색에 대한 이야기,
체중이 높은 여성 연예인에
대한 성적 비하
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인터넷 바카라로
돈을 몇배나 불려서
아는 형한테 외제차 사고,
노래방 지분을 사서
일을 안해도 돈이 벌린다고
말도 안되는
자랑을 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다가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전형적인 사이버도박 중독자의
자기합리화였다.
도박 중독에는 허언증과
자기 합리화가 따라온다.
도박의 무서움에
정말 몸서리쳐졌다.
나이도 어리고,
머리 염색 등을 보면
거의 고등학생인데···
어른이 되어 군대에 있겠지만
과시욕과 여러 유혹에 약한..
순진한 어린아이들이었다.
004/541- 남성세
기초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높게 나와서
나는 오늘 외부 진료를 나갔다.
가던 길에 버스가
바리케이드(탱크 저지선)에
사이드미러를 부딪혀서
앞 창문이 두 개나 깨졌다..
두 명이 다쳤다...
외근은 국군춘천병원에 갔는데,
진단을 세 개나 다시 봐야 해서
혹시 귀가를 하게 될까 봐
많이 걱정스러웠다.
한편 뉴스를 못 보니
슬슬 트럼프가 뽑혔을지
안뽑혔을 지 궁금했다.
귀가 희망자들이
버스에서 교관님 앞에서
욕을 하는데도
화를 안 내고 가만히 계시다가
부대에서도 애들이
말을 안들은 체 시끄럽게 해서
처음 화를 내셨다.
첫날 불침번 때 물통 흔들어서
따당할까 걱정했던 1번이
분노조절장애 사유로 귀가했다.
오늘 다른 동기들은
그사이 군화도 신고
베레모도 쓰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이날 도통
화장실 소식이 없었다.
병원에서 혼자
앉아서 기다리면서
소외감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생활관,
우리 분대 애들은
좀 낫지만
성소수 군인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숨어있다.
그들의 존재 자체로
군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님에도,
군대에서 게이 비하는
정말 흔한 일이다.
누군가 위축되지 않게
통제를 잘 해주셨으면 좋겠다.
005/540 - 파리대왕
오늘 교육 내용은 '군대 예절' 이었다.
교관님이 공동 생활 교육을 하시며
성적 농담을 경고하는 말을 하셨다.
예시로 ‘술집 여자’ 를 사랑해
동거하다 온 훈련병 앞에서,
같은 방 애들이 그런데 갔다 온 얘기를
하도 해 대서 해당 인원이 자기 앞에서 펑펑 운 사례를
예로 드시면서,
공동체 생활에서 절대
발언 조심하라고 하셨다.
군대가 생각보다는
클린한 것 같다.
벌써부터 기가 죽진 않았지만
페미니스트 이등병은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생각보다,
규율로 통제가 되는
집단 생활은
내게 맞는 편인 것 같다.
군대는 소심한 사람도
사회화를 시켜
일원으로 만드는데
힘을 쓰는 곳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유해한 남성성을 인지하고
통제하려 노력하는 교관님이,
멋있어 보였다.
소나기(일기장)를
오늘 처음 받았는데,
뒷 부분에
'국가가 당면한 문제들',
'저출산 대책'에 대해
군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
묻는 부분이...
이상했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책을 읽은 수만명 중
누군가 스텔싱*을
하게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성관계 중 동의없이
콘돔을 빼는 행위
또 페이지 바닥마다
유명한 기업인 등의
격언이 있었는데,
정주영, 헨리포드...
좀 편향적 이었다.
다들 노트를 돌리며
한 줄 짜리 소설을 쓰고,
좋아하는 소설 얘기 하고,
우리 생활관은 의외로 건전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군대에 온 소감은
어색했지만,
세상에 여러 군인이 있고,
성소수자 군인 활동가도,
여성 군인도 있고,
다들 익숙하지 않았을 거라
타협을 했다.
그건 그렇고
6일 째 변비다..
006/539 - 어떤 훈련병 이야기
어제는 불침번 중간 조였는데,
전달 사항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가서
두 번이나 틀렸다.
많이 긴장해
좀 떨었던 것 같다.
대신 뒷사람한테는
잘 전달해줬다.
불침번을 하고 돌아오면서
바깥 가로등 빛이
불투명 유리를 통해서는
무지개 색으로
번진다는 것을 알았다.
오전에는 제식훈련을 했다.
계속 지적받아서 창피했다.
낮에는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사 아저씨가 진행하시며
몸개그도 해주시고
유쾌한 분이셨다.
그다음 다들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미술작가를
하다 왔다고만 했다.
이제 복도에 있는 책을
읽어도 된다 해서,
책장에서
를 빌려왔다.
이스라엘군의
강력함을 찬양하는
진중문고 책
옆에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의 한잘라,
호주 성소수자의 노래,
노동자의 투쟁을
다루는 책이
군대 안에 있었다.
읽다가 눈물이 찔끔 났다.
오늘 나는
분위기에 진 기분이다.
할 말을 못한 게 분하다..
다들 남이고 나는 나인데,
일주일 간 친해진 전우들이
갑자기 족쇄가 되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선의로부터 나오는
결속일 수도 있다.
내가 속한
3,4분대 인원들은
이제 다들
내가 페미인 걸
아는 듯 하다.
1,2분대 앞에선
아직 긴장되고
어색하다.
+
밤에 불투명한 창문 너머의
가로등 불빛 가장자리에
무지개가 보였다.
+
지식채널 E 책에서 무지개 그림이 나왔다.
007/538 - 지식채널 e